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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12)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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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

 

16,1-8 읽기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등이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순간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달아난다. 

베드로마저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반대자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가? 제자들의 배반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 뒤따르기’와 ‘참된 제자 되기(discipleship)’라는 주제의 끝은 아니다. 

이야기의 대반전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번에 함께 읽을 본문은 16,1-8이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① 단락 나누기

 

16,1-2에 나타난 시간적 배경은 ‘안식일이 지나자’와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고, 등장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이다. 

공간적 배경으로 ‘무덤’을 언급하는 것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형이다. 

이 시작 부분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되시는 장면(15,42-47 참조) 바로 뒤에 나온다. 

그리고 16,9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간 첫날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신 장면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16,1-8은 무덤에서 있었던 

사건을 서술하여 문학적 단일성을 띤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멀리서 지켜보던 여인들이었다(15,40 참조).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로 소개된다(15,41 참조).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모셔지는지 지켜보았던 이들이다(15,47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증인이 바로 그분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부활의 증인 역할을 한다.

 

15,46에 따르면,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이번 본문에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기 위해 무덤에 갔다. 

그들이 만나기를 예상했던 예수님은 시신이 된 예수님이다. 

그런데 무덤 입구의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고 웬 젊은이가 무덤 안에 있었다. 

그는 6절에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hjgevrqh)”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은 동사 ‘일으키다(ejgeivrw)’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표현된다. 

이 수동태는 행위의 주체가 하느님임을 알리는 신적 수동태(神的 受動態, divine passive)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분이 걸으신 길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이었다면, 

그분의 부활은 예수님의 길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적이고 결정적 대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시신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7절에서 젊은이는 여인들에게 명령법 동사인 

‘가라(uJpavgete)’와 ‘말하라(ei[pate)’를 써서 전한다. 

여인들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고 말해야 한다. 

젊은이는 먼저 14,28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예고,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나는 먼저 갈 것이다(proavxw)’ 동사는 ‘먼저 가다’, 

앞서 가다(proavgw)’의 미래 시제이다. 

그런데 16,7의 ‘그분은 먼저 가실 터이니(proavgei)’가 현재 시제로 표현된다. 

미래 시제가 예수님의 예고 말씀을 가리킨다면, 

현재 시제는 그 예고가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동사 ‘앞서 가다(proavgw)’의 의미이다. 

이 동사는 앞서 언급한 두 구절을 포함하여 마르코 복음서에서 총 다섯 번 사용되었다. 6

,45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보다 먼저 벳사이다로 가게 하시는데, 

여기서 동사 ‘앞서 가다’는 시간을 뜻한다. 1

0,32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고(hn proavgwn) 

뒤따르는 이들(oiJ ajkolouqou'nte)은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동사 ‘앞서 가다’는 공간을 뜻하며 ‘뒤따르다(ajkolouqevw)’와 짝을 이룬다. 

11,9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는 예수님을 ‘앞서 가는 이들(oiJ proavgonte?’과 

‘뒤따라 가는 이들(oiJ ajkolouqou'nte)’이 언급된다. 

여기서도 동사 ‘앞서 가다’는 공간을 뜻하면서 ‘뒤따르다’와 함께 나타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동사 ‘앞서 가다’는 10,32; 14,28; 16,7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표현한다. 

그리고 ‘뒤따르다’와 짝을 이룬다. 즉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다’, 

‘앞서 가다’ 동사로 표현되고 제자들은 ‘뒤따르다’로 표현된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먼저 가다’, ‘앞서 가다’는 제자들의 ‘뒤따르다’를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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